국제

한반도 평화와 동아시아 다자협력
한반도 평화 촉진하는
동아시아 공동체 비전 필요

한반도 분단은 남북한 당사자 갈등 이전에 국제정치의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국제정치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남북한 분단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고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이른바 4강은 한반도 평화의 이 해 당사국이기 때문이다.

남북한 갈등과 더불어 4강 국가 간 경쟁적 관계로 인해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 및 동아시아는 다자협력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2003년 출범한 6자회담의 경우는 북한 핵문제와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한이 참여한 다자협력이라는 의미가 있다.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출범했지만 미국의 대북정책 그리고 참여 국가 간 다중적 역학관계로 인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교착상태에 빠졌다. 결과적으로 당사국들은 양자관계 또는 삼각관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양자관계 및 양자동맹 중심의 외교는 강대국의 의지에 따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반도 평화가 이들 국가 간 갈등과 경쟁에 따라 영향을 받는 종속변수로 취급되는 결과를 낳았다.

지난 11월 4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임팩트 포럼에서 아세안+3 정상회의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

국제정치 파워게임의 한계

최근 미·중 무역 갈등은 패권 경쟁의 양상을 띠고 있다. 중국의 부상에 대응할 적기를 놓친 미국이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와 재균형(Re-balancing)정책을 표방하면서 동아시아는 양국 간 경쟁과 갈등의 장이 되었고, 이로 인해 남중국해의 갈등도 격화되었다

한편 미국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주도하며 다자무역질서 재편 과정에서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중국의 참여가 원칙적으로 열려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국의 참여를 배제했다. 중국은 아세안을 비롯한 16개 국이 참여하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주도하며 경쟁적 양상을 띠었다.

나아가 중국이 주도하는 일대일로 이니셔티브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미국은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Free and Open Indo-Pacific)전략으로 맞서고 있다. 인도태평양전략은 일본, 호주, 인도를 중심으로 지역 협력 강화를 목표로 한다. 해당 지역 내 인프라 개발 등에 대한 투자 지원 등을 포함하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이다.
미국과 중국이 각각 주도하는 지역 이니셔티브는 본질적으로 패권 경쟁의 양상을 띠고 있다. 동아시아 차원의 다자협력보다는 패권국과 패권 도전국의 전략적 수단 성격이 짙다. 양국 간 경쟁이 심화됨에 따라 기존 동 아시아 지역협력체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우려된다.

동아시아 비전과 다자협력

1997~98년 아시아 경제위기를 계기로 본격화된 동아시아 협력은 아세안+3(APT) 제도를 탄생시켰다. 2001년 동아시아공동체를 향한 장기 비전을 제시한 동아시아비전그룹(EAVG) 보고서가 채택됐다. 보고서는 정치 안보, 경제, 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력을 제안 했다. 안보협력과 관련해서 신뢰구축을 강조하며 안보관련 인적교류와 훈련 협력을 주요 방안으로 제시했다. 갈등 예방과 회피를 위한 지역협력을 주장하는 한편 지역적 차원에서의 평화유지활동 목표에 대한 논의 필요성도 제기했다.

한편,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은 역내 ‘안보협력’을 위한 보다 효과적인 메커니즘이 될 수 있도록 협력할 것을 촉구했다. 안보협력의 주요 분야로 초국가적 범죄에 대처하는 메커니즘과 협의를 강화할 것을 주장했다. 테러리즘, 초국가 마약조직, 인신매매 등 초국가적 범죄에의 대응을 비롯한 비전통적 안보협력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2013년 채택된 EAVG II 보고서는 1차 보고서와 비교할 때 안보협력이 진척되지 않았고 관련 비전도 정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아시아 경제공동체가 제시되었지만 나머지 두 축인 정치안보와 사회문화 분야에 대해서는 공동체 건설에 대한 언급이 없다. 결과적으로 안보 분야와 관련해서는 분절된 형태의 기능적 협력만이 열거되었다. 대량살상무기의 확산방지 관련 협력과 대테러, 사이버 범죄, 마약 및 인신매매, 해양안보 등의 협력을 강조하지만 여전히 그 구체성은 담지 못했다.

APT 내 중국과 일본의 경쟁관계와 더불어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 참여하는 미국의 대중국 견제는 동아시아협력의 진척에 여전히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해양안보 개념 속에 있는 실질적인 목표는 남중국해에서의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다. EAS도 지역 안보 현안들, 예를 들어 한반도 평화와 남중국해 문제, 그리고 비전통적 안보 이슈에 대한 협력을 지속하기로 밝히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 등도 참여하고 있어 보다 광범위한 논의를 진행할 수 있어 보이나, 강대국 간 이해관계가 엇갈려 오히려 심도 깊은 논의에는 부적합하다. 제도화 수준과 회의 빈도에서도 APT에 미치지 못하며 공동체 건설을 향한 비전의 공유도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아세안이 주도하는 ARF는 역내 유일의 안보협의체로 서 기능하고 있다. 남북한이 동시에 가입하고 있어 남북한관계 경색 국면에서 보완적 대화 채널로서 의미를 지닌다. 다만 남북한관계가 악화될 경우 상대국에 대한 비난을 이끌어내는 경쟁의 장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특히,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관련하여 미국은 한때 ARF에서 북한의 회원국 자격 박탈 등을 추진할 것을 아세안 국가들에 요청하는 등 아세안 국가들에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나마 다자협력 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세안이 개별 국가들이 아닌 지역기구로서 발전시켜온 규범을 지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북한과 아세안의 대화관계수립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촉진할 수 있는 보완적 대화의 채널로 기능할 수 있다. 사진은 지난 11월 26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연합

아세안 규범과 동아시아 다자협력의 가능성

아세안은 냉전시기 비공산권 국가들의 협의체로 출범하였지만 중립성과 등거리 외교를 원칙으로 삼았다. 역내 회원국 간 내정불간섭의 원칙을 지역적 차원으로 확대하여 아세안을 외부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역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협의와 합의를 중심으로 하는 의사결정 과정은 특정 국가가 힘을 앞세워 압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아울러 민감한 사안을 직접적으로 다루기보다 공식 및 비공식 대화 채널을 충분히 활용하여 신뢰구축을 우선적으로 추진했다. 1976년 동남아우호협력조약(TAC)의 체결을 통해 주권 및 영토의 상호존중, 내정불간섭, 무력 불사용 및 갈등의 평화적 해결 등을 아세안 규범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전통과 안보분야에서의 신뢰구축 경험에 기반한 아세안 규범은 냉전시기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이룩하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냉전 해체 이후 베트남 등의 회원국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우호협력조약은 아세안 역내 회원국 간 합의에 그치지 않고 대외관계에서 아세안의 중심성(Centrality)을 강화하는 데도 기여하고, 동아시아 차원의 규범으로서도 확대되었다. 중국이 2003년 TAC를 조인한 것을 계기로 주요 국가들도 조인했다. 2005년 아세안은 EAS 출범을 앞 두고 그 가입 조건으로 아세안과 TAC 체결을 내걸었다. 당시 대테러 등과 관련하여 유사시 군사 작전 등을 계획하고 있던 호주는 EAS 참여 직전까지 TAC의 조인을 미룬 바 있다. 2005년 아세안이 주도하는 EAS의 출범으로 아세안을 중심으로 한 주요 국가들이 TAC를 조인하는 다자협력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향후 동아시아 안보협력과 신뢰구축의 강화를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TAC의 다자화를 통해 EAS 차원의 우호협력조약 체결을 목표로 삼을 수 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진전에 따라 북한의 국제사회 편입은 자연스럽게 추진될 것으로 전망된다. 아세안 규범과 중심성은 북한이 아세안을 일방의 편을 들지 않아 신뢰할 수 있는 중재자로 인식하게 했다. 아세안은 북한 일방에 대한 비난보다 한반도 차원의 평화에 대한 지지를 지속적으로 표명해왔다. 북한은 아세안과의 공식 적인 대화관계 수립을 희망하고 있다. 북한에 대한 유엔 차원의 제재 결의안 등으로 제약을 받고 있지만 아세안 또한 개별적으로는 북한과 정치경제적으로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아세안 10개 회원국 모두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라오스 등은 특히 북한과 전통적으로 우호적인 관계에 있다. 1989년 한-아세안 부분적 대화관계 수립이 그러했듯이 북한과 아세안의 대화관계 수립은 북-아세안관계 발전과 더불어 아세안과 남북한이 동시에 대화의 장을 가질 수 있는 이른바 아세안+2로서의 가능성도 열려 있다. 이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촉진할 수 있는 보완적 대화의 채널로 기능할 수 있다.

아세안은 1995년 동남아비핵화조약(SEANWFZ)을 체결하여 이미 역내 비핵화를 달성했다. 다만 핵보유국들의 핵무기 선제 불사용에 대한 보장을 하지 않아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다. 이를 동아시아로 확대하여 동아시아비핵 지대를 선도할 가능성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즉 아세안, 남북한, 일본이 동아시아 비핵화에 참여하여 지역적 차원의 의무 이행력을 높이는 한편 핵보유국인 미국, 중국, 러시아는 핵무기 선제 불사용을 보장하는 형태이다. 이는 양자 간 협상이 갖는 한계, 즉 국내정치적 변화에 따라 의무불이행 및 약속 파기 가능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 다자협력이 강대국의 경쟁 속에서 제한적으로나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아세안 규범과 중심성에 기반했기 때문이다. 한반도 비핵화, 남북한의 안정적 대화채널 확보, 나아가 동아시아 다자협력의 비전 공유를 위해서는 아세안 규범의 확대로 동아시아 공동체의 비전을 회복하고 그 중심에 평화를 향한 안보공동체적 비전을 담는 것이 시급하다. 한반도 평화에 따른 결과로써 후차적으로 추진할 동아시아 다자협력이 아니라 한반도 평화를 촉진하는 선행적 과제이다.

김형종 김형종
연세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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