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한일관계 재조명과 제언
냉전시대를 넘는 한일관계로 재정립이
필요하다

지금 한국은 내우외환, 사면초가의 매우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다. 국내적으로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갈등이 격화되어 있고, 문재인 정부가 공을 들인 남북관계도 대북제재로 꽉 막혀 있다. 미국과의 관계도 방위비 분담금 등을 둘러싸고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난제와 함께 지난해 10월, 일본기업에게 식민지 시기 징용공에 대한 배상을 명한 대법 판결에 일본의 관민이 ‘약속 위반’이라고 일제히 반발하면서 한일갈등도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 일본이 한국에 경제제재를 가하고 쌍방 보복전의 양상으로 확산하고 있는데, 지소미아 문제로 미국까지 일본의 역성을 들고 나옴으로써 문제를 꼬이게 했다.

일본이 주장하는 ‘약속’이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식민지시기 조선인의 청구권 합의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인 것이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2015년 12월 28일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한일 외상 합의’에서도 “최종적, 불가역적”이라고 “약속”했다는 주장이다. 일본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12·28합의를 전면 재검토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10억 엔을 갹출하여 만든 ‘화해·치유재단’을 해체한 조치에 격앙되어 있다. 한국 정부는 정부와 무관한 국제인권법과 한국 사법부의 판단에 따른 조치라고 누누이 설명했지만 일본은 자국에 대한 도전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이번 한일갈등은 ‘약속 위반’ 운운을 넘어 한일관계의 본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계기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카이로 선언 이래 우리 민족은 국제정치에서 제자리를 얻지 못했는데 이제서야 민족주권의 중요함을 깨닫고 한반도 평화를 위하여 자주, 자립하고자 하는 자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필연적으로 과거의 냉전분단체제에 기초를 둔 샌프란시스코체제와 그 하위체계인 1965년 한일조약체제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이 낡은 체제를 극복해야만 우리는 참된 주권국가로 남북 평화, 화해, 협력, 통일을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베 정권이 난폭하게 야기한 한일갈등은 우리에게 기회일 수도 있다.

식민지 지배는 “인도(人道)에 대한 범죄”

한일갈등의 뿌리는 강화도 사건으로 시작한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있다. 이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도 “일본이 지배하지 않으면 야만적인 러시아나 지나(중국)의 침략을 받았을 것이다”라는 책임전가론도 있고 “한반도는 일본의 옆구리에 들이댄 비수”이기에 “조선은 일본의 생명선”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는 일본의 편의에 따른 딱지 붙이기에 지나지 않는다. 대륙과 섬을 연결하는 반도는 군사침략의 통로가 될 수 있지만 문명·문화 전파의 다리이기도 하다. “조선이 미개했기에 식민지 지배를 당한 것”이라는 주장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 후에도 애용되는 조선 정체론이다.

한일 병합 이후 조선 총독부가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이 조사 사업이었다. 수탈의 기초를 만들기 위한 토지·산림 조사 및 구관( .慣)조사는 물론 가족·종족 촌락 공동체, 관혼상제, 민속 관습, 종교·풍수·무속·축제·놀이·유락, 의식주, 말과 방언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조사 보고서를 펴냈다. 그 조사의 결과 조선인의 민족성을 ‘당파 싸움을 좋아하고 단결심이 없고, 게으르고, 불결하고 태연히 거짓말을 한다’는 등 열등한 민족으로 규정했다.

구미 열강의 아시아·아프리카 침략과 지배의 합리화 논리도 ‘문명과 야만’의 이원론이다. 외관이나 자질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설명하기 위해 같은 논리를 활용했고, 이는 오늘날에도 일본인의 마음속에 침전해 있다가 때때로 차별과 증오로 분출된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 덕분에 조선은 문명의 혜택을 누려 철도, 우편, 전력, 산업, 교육, 사회, 농업, 수리, 관개 등 모든 면에서 발전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한국의 친일파도 회자하고 있다. 그중에는 ‘식민지 경영은 일본에게는 적자였으며, 조선의 문명화를 위해 많이 투자했다’ 는 입장이나 ‘일본을 위한 것이었어도 결과적으로 조선에 유익했다’는 입장까지 여러 변형이 있다. 그러나 선의의 노예제가 없는 것처럼 선의의 식민지 지배도 있을 수 없다.

2001년 남아공 더반에서 유엔이 주최한 ‘반 인종주의·차별 철폐’ 세계인권대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노예제와 식민지 지배는 나치의 제노사이드에 비견되는 ‘인도에 반한 범죄(Crime Against Humanity)’라고 선언 되었다. 노예는 자유(자기 결정권)를 박탈당하고 24시간 주인에게 예속되는 물건으로 거래된다. 식민지는 집단(민족)을 노예화시키는 체제다. 오늘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어떠한 변명이나 합리화도 노예의 옹호처럼 전혀 존재할 여지가 없다. 노예제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적 청산은 21세기 최대의 인권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지난 11월 23일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한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일본 외무상이 회담을 하고 있다. ⓒ연합

지난 11월 18일 도쿄 일본 수상관저 앞에서 아베 총리의 퇴진을 촉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연합

한일관계의 기초가 된 샌프란시스코체제

1945년 일본군 점령 지역의 무장 해제를 명목으로 한 미·소의 분단·점령으로 한반도는 3년간의 신탁 통치를 겪었다. 6·25전쟁이 시작된 이듬해인 1951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에 대한 연합국(미국)의 점령에 종지부를 찍고 주권을 회복시키는 국제법적 조치였다. 하지만 강화회의는 소련·사회주의권의 불참에 더해 일본의 군사 침략·지배의 가장 큰 피해자인 중국과 남북이 배제되고, 미국과 그 추종 국가만 모인 단독강화회의가 되었다.

1949년 동서독 정부의 성립으로 연합국의 대독 점령 시기가 종료되고 대소련 공산권 군사동맹인 NATO가 성립된 것과 맞물려, 동아시아에서도 대공산주의 군사 체제를 구축하려는 의도가 샌프란시스코 단독강화회의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는 연합국의 대일 점령정책인 카이로선언, 포츠담선언의 확인과 전후 일본의 영역 및 국제적 책무의 범위를 확정했다. 동시에 일본의 ‘주권’ 회복 후에도 반영구적인 미군의 주둔과 기지 사용을 보장하는 미일안보조약이 체결되어 미국은 일본을 속국화했다. 동시에 중국은 초청하지 않고 국민당 정부(중화민국)만을 상대로 일화(日華)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동아시아 반공진영의 대일전쟁 종결절차는 한국을 제외하고 종지부를 찍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체제의 남은 고리인 한일관계를 설정하는 교섭이 바로 개시되었다. 미국에게는 공산권에 들어간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침략에 따른 피해 복구와 과거 청산이라는 관점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1948년 분단국가, 대한민국의 수립이 선포되면서 이듬해 1월 도쿄에 한국 대표부가 설치되었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조인 바로 뒤인 1951년 10월 20일 도쿄에서 한일 예비회담이 개최되었다. 한일회담은 원래 일본과 한국이 식민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청산하고 주권국가로서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을 배제하고 한국과만 수교협상을 벌인 것은 식민지 책임의 청산보다는 한일이 정치·군사적으로 협력하게 하고, 미국의 정치 군사적 이익에 봉사하게 하자는 의도가 선행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일조약은 한일 기본 조약과 청구권 협정, 어업 협정,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 협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은 한국 정부가 취약한 한국 어업의 보호를 위해 마련한 어로제한선(이승만 라인) 침범으로 억류되어 있는 어민의 석방을 시급한 과제로 삼았다. 미국은 재일 한국인 을 심각한 치안문제의 위해 요인으로 보고 ‘재일 한국인 법적 지위 협정’에 관심을 보였으나 전체적으로는 한일 기본 조약과 청구권 협정이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었다.

청구권 협정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이나 보상을 일본이 거부했기 때문에 일본인과 조선인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채권에 대한 청구권 정리를 명목으로 협상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모든 문제를 ‘독립 축하금’ 명목의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의 경제 협력자금으로 마무리했다. 한일 조약에서 가장 중시되어야 할 것은 식민지 지배의 성격 문제였다. 한국은 무력에 의한 위협으로 자행된 병합조약 자체의 불법성을 주장했고, 일본은 병합조약이 조선왕조(고종)와의 사이에서 적법하게 체결되었다고 주장했다. 1965년 조약에서는 적법과 불법 어느 쪽으로도 읽을 수 있게 “이제는 무효”라고 얼버무리고 독도 영유권 문제도 명기를 피하면서, 한일 간 화근을 남긴 채 조약체결이 강행되었다.

그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베트남 전쟁에 본격 개입한 미국이 작전병력을 제공하는 한국과 후방을 지원하는 일본의 긴밀한 연계를 강력히 주문한 것에 있다. 1962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자신들의 정통성에 대한 미·일의 정치적 승인과 일본의 정치자금 제공 및 경제원조를 기대했다. 일본으로서는 한반도와의 국교정상화가 전후 일본외교 현안인 데다 일본자본이 한국시장에 진출하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다.

한일관계의 기초가 되는 샌프란시스코체제와 65년 체제는 미국이 구축한 동아시아 냉전·분단체제다. 또한 반 파시즘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그 내부의 파시즘을 보존·복권시켜 일본의 탈 군국주의 개혁을 유산시키고 만든 미·일 결탁에, 한국 친일군사독재정권을 종속시킨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일본이 말하는 ‘안정적 한일관계’란 반세기 전 반공냉전체제 하의 한일관계를 말하며, 21세기인 오늘날에도 한일관계의 기초라고 강변하고 있으니 현실에서 갈등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베 정부에 대해서는 단호한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반면, 광범한 일본 사회와 시민에 대해서는 적극적 교류를 선도하여 식민지 시대와 냉전 시대를 넘어가는 그림을 제시하고 이성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식민지와 냉전의 추억에 젖은 일본

그동안 한국에서는 군사독재 정권이 붕괴되었다. 미국에서는 초강대국의 체통도 벗어던지고 미국과 자신의 작은 이익을 탐하며 좌충우돌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하며 국제정세의 불투명성을 증대시켰다. 중국의 실용주의 경제대국화와 더불어 남북관계도 김대중 정권 이후 크게 변화했다. 작년 이래 3차례에 걸친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는데, 미국을 추종할 줄 밖에 모르는 일본은 이러한 동아시아의 커다란 정세변화에 주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냉전시대의 추억에 고착하고 있다.

이웃나라로서 한일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기에 양국이 과거의 왜곡된 종속체제에서 탈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천황 즉위식에 간 이낙연 총리가 문 대통령의 친서를 아베 총리에게 전달하니 거들떠보지도 않고 “약속을 지켜라”라고 했다고 한다. 그 후 G20 참가차 방일해 일본요인들과 만나려 한 문희상 국회의장도 무시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매우 무례한 외교적 결례다.

한국 정부는 갈등을 풀기 위해서 일본에 화해의 제스처를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나, 아베 정부는 한국에 대한 제재 조치가 효과를 내기 시작한 것으로 착각하고 더욱더 기고만장한 것 같다. 물론 정치적 책임이 있는 자로서 교착상태를 풀려고 성실하게 노력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있겠으나, 아베는 그 성의와 선의를 나약함으로 이해하고 자만할 것이다. 지금은 아베의 표정에 일희일비할 때가 아니다. 그 허언과 속임수로 일본의 민심도 많이 잃은 아베 정부에 대해서는 단호한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반면, 광범한 일본 사회와 시민에 대해서는 적극적 교류를 선도하여 식민지 시대와 냉전 시대를 넘어가는 그림을 제시하고 이성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우리는 우선 내부의 친일파를 극복·정리하면서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고 남북협력을 증진시켜 민족적 주권을 다져야 한다. 일본과 국제 여론에 한일관계의 실상을 이성적이고 성실하게 알리면서 거짓과 오만, 독선에 넘치는 아베 정권을 정중하게 고립시켜야 한다. 21세기 동아시아에서 샌프란시스코체제와 65년체제는 넘어서야 할 역사의 장애물이다.

서승 서승
우석대학교 석좌교수·동아시아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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