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

남남갈등을 남남공존으로 전환시키자

2019년은 민주주의가 만개한 해라고 할까? 아니면 남남갈등이 일상화된 해라고 할까? 해마다 자유민주주의적 관점에서 국가별, 부문별 민주주의 지수를 발표하고 있는 미국 프리덤하우스(Freedom House)가 발표한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는 몇 년째 80점대를 기록하여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었다. 특히 국경없는 기자회의 언론자유지수는 2016년 70위에서 2019년 41위로 상승했다. 2006년 31위를 기록했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들어서서 급속히 하향되었던 것이 2017년 이래로 상승하고 있다. 이는 언론의 자유를 포함한 민주주의의 전반적 환경이 보다 양호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민주적 환경의 개선은 남남갈등의 가능성이 확대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민주적 환경의 개선과 남남갈등

11월 23일 0시를 기해 종료될 것으로 예상됐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즉 지소미아에 대해 청와대는 종료 6시간을 앞두고 조건부 연장을 극적으로 발표 했다. 이 발표가 나오기까지 제1야당의 우군인 태극기 부대를 필두로 한 보수단체들은 문재인 정부를 전면 비난하며 지소미아 종식 반대를 주장해왔다. 반면 조건부 연장 발표가 나오자마자, 7월 이래로 反아베 운동을 펼쳐오던 시민사회 단체들은 즉각 연장 결정을 규탄하는 주장을 하며 집회를 열고 있다.

바로 그 직전 조국 전 장관 사퇴를 외치는 세력들의 광화문 집회와 조국 수호 및 검찰 개혁 주장 세력들의 서초동 검찰청과 국회 앞에서의 집회로 한국은 거대한 민주주의의 메카를 방불케 했다. 발언의 수위는 거의 통제되지 않았다. 대통령 비난을 넘어, 저주를 퍼붓는 듯한 주장은 무기만 들지 않았지, 거의 인격 살해 수준이었다.

민주주의가 보장된 현 상황에서 우리 사회에는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남남갈등이 횡행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남남갈등은 주로 북한이나 통일 관련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분단에서 파생된 남남갈등

한국 현대사에서 남남갈등의 기원은 해방정국에서 찾을 수 있다. 해방과 분단의 고착 과정에서 청산되지 않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문제와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부활한 친일파 문제는 대한민국의 사회정치적 갈등을 만드는 심연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분단은 남과 북으로 이념과 체제에 따른 사람들의 이동을 만들어 냈다. 38선 이북지역에서의 대대적인 친일파 일소와 토지개혁 정책 추진으로 수십만 명이 월남하였다. 특히 20~30대 월남민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친일경찰에 들어가거나 반공단체를 만들었는데, 대표적인 조직이 ‘서북청년회’이다. 그들은 해방정국의 각종 좌우대결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다.

그 예를 2015년 영화 <암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암살>의 후반부인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 법정에 회부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염석진(이정재 분)은 반민족행위를 애국으로 포장하여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가 회심의 미소를 띠며 반민특위 법정을 빠져 나올 무렵, 그 법정 앞에는 서북청년회로 추정되는 한 무리가 반민특위를 빨갱이로 매도하고, “반민특위를 해체하라”고 외치며 행진을 했다. 실제로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는 친일경찰의 습격을 받았다. 당시 반민특위 특경대원은 ‘개’처럼 끌려가 헌병들에게 짓밟혔고, 반민특위 직원 100여 명은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었다.

한편 해방 당시에 좌익이나 중도 민족주의 계열의 많은 사람들은 친일파 및 일제 잔재 청산, 민주정권 수립을 비롯하여 모스크바 3상회담 결정, 소위 신탁통치안과 통일임시정부수립을 지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1946년 3·1절에는 좌우세력이 분리되어 좌익들은 남산에서, 우익들은 서울운동장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해야 했다. 시위행진 도중 좌우세력이 충돌하며 남남갈등의 심각성이 드러났다.

지식인이나 민중들이 좌우 프레임으로 갈라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언론이었다.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의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독립주장”이라는 일종의 가짜 뉴스는,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새로운 사회를 갈구하던 해방정국의 분위기를 남남갈등의 양상으로 완전히 바꿔놓았다.

6· 25전쟁과 긴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더 이상 자유로운 분위기는 볼 수 없었다. 1970~80년대까지 학생들, 특히 대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정부를 비판했다고는 하지만 1980년대까지 정부를 공공연하게 비판하기 위해서는 반공주의를 전제로 해야 했다.

통일 문제 역시 ‘창구 단일화’라는 프레임과 국가보안법에 갇혀 있었다. 정부라는 창구 단일화 프레임을 깬 것은 역시 대학생들이었다. 1989년 6월 30일, 21살의 청년 임수경이 북한에 무단으로 잠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임수경은 7월 1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했고, 그로 인해 판문점을 넘어 귀국하자마자 체포되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래로 이미 도전받은 정부의 창구 단일화 프레임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마침내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다.

자료: 국경없는 기자회 ※2011년은 언론자유지수 발표없음

남남갈등의 조건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남남갈등이 형성·확산되는 조건으로는 우선 민주주의적 분위기의 조성이 필수다. 해방정국에서 일제의 전체주의적 통제와 억압이 종식되면서 일정 정도 민주적 기본권과 집회 및 시위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또한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으로 민주적 기본권이 보장되자, 상반되거나 다양한 입장의 세력이나 시민사회단체들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 남남갈등이 확산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전체주의 사회나 독재 사회에서는 다양한 입장 또는 상반된 입장이 공존할 수가 없다. 진정한 민주주의 정부라면 자신에 비판적인 주장, 대세를 거스르는 주장이라고 하여 억압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보면 남남갈등은 민주주의 사회라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실은 남남갈등이라는 말도 어폐가 있다. 심지어 국론분열로 치부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스스로 좁히는 말이다. 오히려 ‘갈등’을 강조하기보다는 입장과 관점의 다양성, 생각과 표현의 다양성으로서 인식하고 인정할 필요가 있다.

다양성의 공존이 아니라 다양성의 대립과 충돌로 비치는 데에는 민주주의의 미성숙과 방법론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구세대나 보수적 운동단체들은 시대적 한계와 냉전적 사고로 인해 인권이나 평화와 같은 보편적 가치나 상생의 가치보다는 냉전적 가치와 양자택일적 가치, 멸공통일적 가치를 내면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시대적 특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북한과의 평화·번영,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자못 불편할 수밖에 없다.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이래로 남북교류가 봇물 터지듯 일어났다. 1998년부터 2008년까지 금강산 관광을 했던 약 200만 명, 2005년부터 3년간 개성 관광을 했던 11만여 명, 2004년부터 2016년 2월까지 개성공단에서 사업했던 308개의 기업과 관계자들에게서 평화와 교류의 기억을 그 어떤 권력도 지울 수 없다. 이미 우리 사회에는 평화와 번영의 가치를 수용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언론의 자유와 민주적 환경이 좋아지면서 남남갈등도 격화되고 있다.

“이제 남남갈등이라는 말을 버릴 때가 됐다.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 이해, 공통성과 타협의 정신에 기반 한 남남공존을 해야 한다.”

남남갈등 아닌 남남공존으로 인식 전환

냉전적 가치와 반공통일적 가치를 가진 사람들과 평화 번영의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표면상 남남갈등의 형태로 대립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21세기 지구촌 시대라면 평화적 가치가 당연히 정당하고 보편적이다. 그렇다고 하여 냉전적 가치를 억압하고 통제하기만 한다면 결국 평화적 가치도 냉전적 가치와 다름없이 폭력적이며 양자택일일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21세기 지구촌 시대를 살면서 더 이상 냉전적 이념과 방법으로 나와는 다른 사람이나 사상을 통제하고 양심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서로 양보하고 서로 배우며, 상생적 가치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며 서로의 차이를 다양성의 분출로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양성의 분출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답은 분출의 억압이나 거짓에 기반을 둔 반인권적 폭력이 아닌, 다양성의 공존과 소통을 통하여 창조적 길을 찾는 데 있다. 우리는 중국이나 베트남식의 무력 통일의 길이나 독일식의 흡수통일의 길이 아닌 제3의 길을 찾아야 한다. 아니, 이미 우리는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을 통하여 제3의 길을 걸어왔다. 남북의 제도와 체제, 방법의 차이를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낮은 문화가 높은 문화를 따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찾을 수 있었다.

이제 남남갈등이라는 말을 버릴 때가 됐다.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 이해, 공통성과 타협의 정신에 기반한 남남 공존을 해야 한다. 이러한 남남공존의 철학은 향후 남북 갈등의 더 큰 언덕을 넘는 지혜가 될 것이다.

ⓒ연합

김귀옥 김귀옥
한성대학교 교양교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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