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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그곳에서 만나는 새로운 맨 얼굴 제주 특별 자치도

해가 가장 먼저 닿는 곳, 섭지코지
첫 술에 배부르랴. 하루에 제주도의 많은 명소를 모두 둘러보는 것은 과유불급이다. 지도를 펼쳐놓고 1132번도로와 1118번도로를 연결해 1/3크기의 반원을 만들었다. 오늘 여행은 딱 여기까지다, 마음 속에도 미련없이 선을 그었다.
우선 공항에서 차를 몰아 1132번 국도를 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복리와 월정리를 잇는 해안도로를 만나고, 조금 더 가자 제주 동부 지역 최고 드라이브 길로 꼽히는 세화-섭지코지 코스에 오를 수 있었다. 태양이 가장 먼저 닿는다는 섭지코지에서 부터 제주의 이야기를 시작해본다.



우뚝 솟은 성산일출봉을 마주하고 있어서 일까, 이곳은 우리나라 전역을 통틀어 가장 먼저 해가 닿는 곳으로, 모든 곳이 따사롭고 호기롭다. 섭지코지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일품이다. 붉은 화산재 언덕인 ‘송이’ 오름 위에는 조랑말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목책을 따라 핀, 아직 시들지 않은 노란색 들국화 진한 향기는 해풍에 실려 고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 등대 난간에 서면 그때부터 시야엔 온통 바다다. 시인 이생진은 '성산포에서는 푸른색 외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고 썼다. 그의 표현처럼 짙푸른 수평선, 은빛찬란한 바다에 그만 ‘쩡’하고 눈을 베일 것 같다. 섭지코지에서 성산포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내 말을 하고 바다는 제 말을 하고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기는 바다가 취한다’고 쓴 시인의 심정을 조금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다시 1132번 도로를 따라 해안 경치를 감상하다보면 만나는 곳이 바로 제주 올레 3코스이자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촬영지로 알려진 신풍 신천 바다 목장이다. 10만 여 평의 드넓은 초원이 바다와 수평을 이루며 끝없이 이어져 있다. 하지만 진짜 제주도 말 문화를 보려면 가시리마을에 가야 한다. 가시리마을은 600년 목축문화가 살아 숨쉬는 유서 깊은 고장으로 지금은 조랑말체험공원이 들어서 있다.


1136번 국도를 갈아타고 가시리 사거리에서 한라산을 마주보며 언덕길을 오르기를 한참, 작은 오름들 외에는 인가도 점포도 없는 한적한 길가에 차를 세웠다. 길 양 옆으로 파스텔톤 물감을 흩뿌린 듯 야생화가 피어있었기 때문. 허리를 굽혀 들여다보니 코스모스다. 고산지대의 강한 바람에 저항하며 스스로 키를 낮춘 난쟁이 코스모스가 겨울이라는 계절이 무색하리만치 흐드러지게 피었다. 제주의 숨은 속살을 본 것 같아 기분이 묘해졌다.

다시 갈길을 재촉해서 조랑말체험공원으로 향했다. 초지와 오름이 어우러져 예부터 최적의 말 방목지로 꼽혀왔던 이곳에 지금은 조랑말박물관과 승마장, 게스트하우스, 몽골텐트 모양을 한 이색 캠핑장 등이 들어서 있었다.

같은 도로 선상에 있지는 않지만, 삼다三多로 유명한 제주에 왔으니 제주 돌문화공원도 잠시 들러봤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제주 돌문화공원은 총 3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주의 문화와 주거환경 그리고 거대한 돌탑들을 확인할 수 있어 세월의 깊이가 느껴졌다.
소중한 사람은 억새밭으로 데려가라, 아끈  다랑쉬 오름
고산길을 내려와 다시 1136번 도로를 올라타면 차창 밖으로 아기자기한 오름들을 볼 수 있다. 세계 자연 유산인 거문오름 외에도 제주도에는 많은 오름이 있는데 이번에는 용눈이오름, 다랑쉬오름, 아끈다랑쉬오름이 목적지다. 이들 오름은 높이가 낮아서 올라가는데 부담이 없고, 억새가 많아 풍경이 수려하며, 주변 산담(방목하던 마소가 들어와 풀을 뜯거나 묘를 허무는 것을 막기 위한 돌담)을 통해 제주도 특유의 장묘문화를 엿볼 수 있다.

세 개의 오름 중에서도 가장 당당한 모습의 아끈다랑쉬오름. ‘아끈’이란 제주말로 ‘작은’을 뜻하는 접두어이다. 관목류가 조금씩 오름의 비탈면을 덮고 있지만, 분화구 주변에 난 앙증맞은 길들을 살펴보면 ‘아끈’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절로 이해하게 된다. 아끈다랑쉬오름에 올라서서 마주할 수 있는 흔들리는 억새의 풍경은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장엄함을 느끼게 하며, 소중한 사람은 억새밭으로 데려가서 그 풍경을 함께 즐기라는 우스갯소리도 마냥 유머로만 들리지 않게 한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역사의 눈물 제주 4.3공원,  평화통일 불 사리탑
1136번 국도를 타고 북서방향으로 가다보면 4.3공원과 평화통일 불 사리탑을 만나게 된다. 먼저 닿는 곳은 불 사리탑이다. 보우 스님과 지안 스님, 그리고 중국의 정법 대사 등의 순교비를 세워 전법 정신을 잇고, 일제강점기와 제주 4·3 사건 당시 억울하게 숨진 수많은 영령들을 위로하여 우리 민족의 숙원인 평화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원력으로 창건됐다고 한다.

이윽고 닿은 4.3공원. 갑자기 까마귀 떼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하늘을 뒤덮으며 음울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제주4·3평화기념관 건물은 마치 오래도록 제주도민들의 가슴을 짓누른 상처를 알고 있느냐고 묻는 듯 경건함과 엄숙함을 품고 있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과 관련해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 속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제주 4·3사건. 당시 목숨을 잃었던 부녀자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동상은 이것이 제주도가, 아니 대한민국이 평생 안고 가야할 상처임을 반증하고 있었다.

제주도는 알고보면 항몽, 항일역사를 간직한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한말 의병들과 항일 투쟁가, 그리고 김만덕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모충사, 삼별초의 식수원으로 알려진 구시물, 제주 해녀 항일 운동 기념탑 등이 외세에 굳건히 항거했던 자랑스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마지막 여정, 인심과 이야기를 사고팔다. 제주민속오일시장  애월항에서의 일몰
걷다 보면 소나무 판자를 이용해 지붕을 이은 너와집과 참나무 껍질로 지붕을 올린 굴피집, 눈꽃이 쌓인 가지 끝으로 아직 수확되지 못한 홍시까지. 정겨운 풍경들을 만나게 된다. 갈매산의 장쾌한 경치를 즐기고 싶다면 동굴입구까지 걸어 올라가도 좋겠지만 산행에 자신 없다면 케이블카만이 살 길이다. 7분간 덜컹거리며 올라가는 케이블카 아래로 고운 눈가루가 바람에 날리는 풍광 역시 아름답다.

어느 시장이나 먹거리 근처에는 사람들이 몰리기 마련이다. ‘여러분 ᄎᆞ자줭 ᄀᆞ맙수다’라는 인심 좋은 글귀로 사람들을 부르는 제주 민속 5일 시장은 언제나 제주도민들로 북적인다. 역사와 전통이 깊은 이 시장은 조선말 보부상의 상거래 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여느 시장과 달리 만 65세 이상 할머니들을 위한 ‘할망장터’가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시장 한 칸에, 문화 광장이 마련되어 전통 공연 등도 열리는 모양이지만, 늦은 시간에 도착한 탓인지 쓸쓸하게 텅 비어있었다. 그런 광장의 모습과는 대비되는 모습으로 사람들은 어둠이 푸른빛을 물들여가는 그 시간에도 왁자지껄 떠들고, 큰 소리로 웃으며 물건이 아닌 인심과 이야기를 사러온 듯, 장터의 풍경을 만들어갔다.
시끌벅적한 시장의 풍경을 바라보다, 늦을세라 일몰을 보기 위해 서둘러 애월항으로 차를 몰았다. 사위가 어두워지고 있음에도 애월항에서는 일몰이 보이지 않아 애가 탔다. 해안선을 따라 2km 정도를 더 달려서야 겨우 사라져가는 일몰의 광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해가 저물었기 때문에 제주에서 만들어간 하룻동안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접어야 겠다. 완도나 통영을 한 바퀴 질주하듯 쉽게만 생각했던 제주. TV같은 매체를 통해, 잘 안다고 자부했던 제주의 모습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충남 출신의 이생진 시인이 성산포에 머물며 80편 넘는 시를 쏟아낸 이유를 조금이나 말 것 같다.

맛으로 품은 제주 말고기 코스요리  성게 알 미역국 전복국
제주도까지 와서 대표적인 향토음식으로 꼽히는 말고기를 안 먹어 볼 수 없다. 말고기는 기름기가 적어 담백하고 칼로리와 지방 함량이 낮으며, 철분과 불포화지방산, 아연 등의 함량이 높은 건강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연산군이 정력보강제로 백마만 골라잡아 먹었다는 일화도 있다고. 조천읍 부근의 한 향토음식 전문점에 들러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말고기 코스요리를 주문했다. 코스는 사시미, 육회, 구이, 갈비찜, 탕수육, 칼국수 순으로 이어졌다.

처음 접해보는 말고기는 생각보다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사시미나 육회는 소고기랑 비슷한 느낌으로 단맛이 강하고 고소한 편이었다. 구이용 고기는 육즙이 풍부하고 매우 부드러웠으며 고기 특유의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갈비찜은 달착지근해서 먹기에 좋았고 탕수육은 아이들이 꽤 좋아할 만한 맛이다.
말고기는 소고기와 마찬가지로 핏기가 가시면 바로 먹어야 하며, 오래 두면 질겨져 먹기가 힘들다는 말에 금세 접시가 바닥을 드러냈다. 마지막에 내오는 칼국수는 고기만으로 웬지 허전한 배를 채워주기에 적당한 메뉴였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 애월항 주변 야경을 감상하다가 식당가에서 성게알미역국과 전복국을 먹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성게알미역국에서는 바다 냄새가 물씬 묻어났다. 무엇보다 시원한 국물에 고소하게 씹히는 성게알이 일품이었다. 전복국은 다른 해산물들이 많이 들어가 있어 푸짐했고 개운한 맛을 냈다. 입안에서 씹히는 전복의 식감은 더없이 좋았다.

<글. 김성주 / 사진. 나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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