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꿈꾸다 | 통일을 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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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기다리는 최현미 복서,
금메달에 도전하다!

8·15 한일전에서 노장의 일본 복서 누르고 챔피언 등극
복싱생활 13년 만에 페더급 7차 방어전을 성공한 데 이어 2체급에 걸쳐 챔피언 벨트를 갖게 된 최현미 선수의 통산 전적은 9전 8승 1무이다. “방어만 하기보다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어 한 체급을 올리게 됐다”는 최 선수. 하지만 이번에 광복절을 맞아 개최된 한일전만큼은 매우 긴장된 경기였다. 한 체급을 올려 도전한 데다 알고 보니 상대 선수가 일본의 노장 파이터 푸진 라이카(37) 선수였던 것.

“똑같은 펀치를 맞아도 충격이 다르고 정확도가 달라요. 연륜은 무시할 수가 없거든요. 세계 챔피언 자리를 3번이나 올라갔다 내려온 선수가 마지막 은퇴 게임으로 생각하던 시합의 상대가 제가 된 거예요. 평소 시합 앞두고 긴장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갑자기 귀에서 윙~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개체량 하는 날 NHK방송사로부터 취재 요청 전화가 왔고 상대 선수의 팬 100명이 원정 응원을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한국에서도 광복절에 하는 한일전인데다 그 무렵 남자 축구가 일본에 져서 더욱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다. 최 선수는 ‘여기서 지면 운동을 그만둬야 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고 한다. 10년 동안 함께 해온 관장님이 ‘떨리냐’고 물었을 때 ‘죽을 것 같아요’라고 대답한 건 처음이었다고.

경기 당일은 관중들도 땀에 등이 젖을 정도로 뜨거운 한낮이었고, 경기 중에 호흡마저 쉽지 않았다. 하지만 7차 방어전을 성공한 페더급 챔피언에 ‘연습 악바리’로 소문난 최현미 아니던가. 인아웃복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30분 게임을 위해서 한 달 반 동안 100~150라운드 스파링을 할 정도로 철저히 준비를 했다는 그녀.

“1~2라운드에 몸을 풀고 3~4라운드에 맞고 때리고 5~10라운드에 딱 벌었어요. 심판이 이겼다고 제 손을 들어주셨지만 눈물을 꾹 참았어요. 그러다 돌아섰는데 부모님 얼굴 보니까 못 참겠는 거예요. 엉엉엉 울었어요. 제가 부담을 너무 많이 느꼈었나 봐요.”
‘길거리 캐스팅’ 당해 아코디언 메고 복싱장으로
최현미 선수는 북한에서 3년간 복싱을 했다. 순전히 ‘길거리 캐스팅’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도 키 172cm의 장신인 최 선수는 어렸을 때부터 눈에 띄게 컸다. 자신이 복싱을 하게 된 건 아무래도 ‘운명’인 것 같다고 말하는 최 선수.
“10살 때 아코디언 학원에 다녔는데, 어떤 아저씨가 권투를 하라며 보름동안 따라다녔어요. 아빠한테는 금메달을 따서 장군님께 기쁨을 드려야 한다고도 말했고요.”

딸이 귀했던 집안이라 예상대로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체육관에 한 번 나와 보기라도 하라는 권유에 갔다가 권투에 빠져들고 말았다. 아코디언 학원에 간다고 하고 3개월동안 몰래 체육관에 다녔다고. 이후 관장이 스파링 결과를 갖고 와 부모님을 설득했고,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딸 자신 있냐’고 묻는 아버지에게 ‘자신있다’고 대답하고서야 복싱을 정식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재밌는 것은 권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축구를 해보라’고 권유해 온 감독이 있었는데, 그를 따라 가 본 곳이 한국의 ‘태릉선수촌’같은 곳이었다. 최현미 선수는 그곳 체육관에서 당시 국가대표 ‘언니’와 스파링을 하게 됐는데, 그 스파링 한 번으로 유소년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하늘 아래 태양이 두 개일 수 없다, 맞짱 뜨자
남한으로 온 뒤 최현미 선수가 겪은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어보면 좀 웃음이 나온다. 탈북 과정에서 사람이 그리웠던 그녀는 남한사회로 들어온 바로 다음날 학교에 나갔다고 한다.
“안녕 나는 평양에서 온 최현미라고 해”라고 소개하자 아이들은 ‘동물원 원숭이 보듯’ 몰려들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만져보는 아이도 있었다. 낯설어하던 것도 잠시, 최 선수는 친구들과 떢볶이를 먹거나 쇼핑을 하고, 동아리활동도 하면서 금방 적응할 수 있었고, 친구들도 많아졌다. 하지만 문제는 ‘학교짱’으로 불리는 아이였다.
“정말 유치하게도 하늘 아래 태양이 두 개일 수는 없다며 맞짱을 뜨자는 거예요. 태권도를 하던 애였거든요.”

‘학교짱’이 계속 싸우자며 한 달 동안 괴롭히자 최 선수도 더는 참지 못하겠다며 ‘좋다 맞짱뜨자’고 말했는데 그 친구가 약속장소엘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날 바로 ‘우리 친하게 지내자’며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아닌가. 알고 보니 ‘북한 사람은 손가락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 같다며 웃는다.
당당해지기 위해 남한에서 다시 시작한 복싱
남한에서 복싱을 시작한 계기는 이렇다.
“미술시간에 물을 뜨러 가다가 한 학생과 부딪혀 물컵이 떨어졌어요. 컵을 주워주면서 ‘미안해’라고 말했는데 이런 XXX하면서 세상에서 처음 들어보는 욕을 하는 거예요.”

당시는 오빠도 학교에 적응하기 어려웠고 아버지는 사업 때문에, 어머님은 식당에 일자리를 알아보는 등 집안이 이래저래 안 좋은 상황이었는데 그런 일까지 겹치니까 회의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다짐한 것이 바로 권투로 성공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체육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최현미 선수는 수많은 메달을 따며 빠르게 이름을 알렸다. 유소년 국가대표로 집중 훈련을 받았던 북한에서의 경험이 도움이 됐다. 그러나 선배들의 군기교육, 일찍 국가대표가 된 것에 대한 질투 시기 등으로 체고 생활을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인문계 학교로 전학을 간 최 선수는 2학년 때 부터 혼자 힘으로 시합에 나가야 했다. 당시 경제상황이 여의치 않아 집안의 지원을 받지 못한 최 선수는 저녁 8시부터 새벽 2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3~4시간 잠을 잔 후 새벽 운동을 나갔다가 학교에 가서 수업이 끝나면 또 운동을 하는 생활을 한동안 반복했다.

“오기 같은 거 있죠? 지방에 시합을 가면 적어도 30~50만 원은 있어야 돼요. 제 결심으로 체고를 그만두다보니 시합비를 마련하기 위해 알바를 시작했던 거예요.” 그러나 운동과 아르바이트, 학업을 병행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프로에 뛰어들게 됐다. “금메달을 기대했던 부모님께서는 맘 아파 하셨지만, 그냥 겁 없이 달려들어서 챔피언이 된 거예요. 운도 많이 따랐던 것 같고요.”
기적처럼 다시 열린 올림픽 챔피언의 문
최현미 선수는 복서이기 이전에 늘씬한 키와 귀여운 외모를 가진 여대생이다. 미팅도 하고 연애도 할 나이인데 대학 공부 때문에 바쁘다. 최 선수는 현재 성균관대에서 스포츠과학을 전공하고 있다. 앞으로 전문선수를 양성하는 학문을 더욱 깊이 공부해서 교수가 되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이뤄야 할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바로 올림픽 금메달이다.
“원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여자복싱이 정식종목이 된다는 얘기가 있었기 때문에 복싱을 다시 시작했는데, 안 됐어요. 프로로 전향해야겠다고 결심을 굳힌 것도 그 때문이예요.”
그래도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한 아쉬움은 늘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었는데, 이번 2016년 브라질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이 됐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그녀는 일단 내년 4월경에 방어전을 할 지 벨트를 하나 더 추가할 지 결정하고 2016년 올림픽 금메달도 가져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최현미 선수에게 다시 태어나면 또다시 복싱을 할 거냐고 물었더니 단호하게 ‘노!’라고 말한다. 심지어는 복싱을 시작하는 후배들도 말리고 싶다고.
“한 달에 여자가 8kg를 뺀다는 건 남자가 16kg을 빼는 거랑 같은 거예요. 여자가 지방이 더 많고 같은 잽을 날려도 남자가 한번 날릴 때 저는 두 번을 날려야 똑같은 1칼로리가 소모되거든요. 살 빼야지, 먹고 싶은 거 못 먹지. 매일 아침 10km 뛰어야 되지, 시합하면서 맞지.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새해가 되면 북한에 계시는 조부모님이 더욱 그리워요”
최현미 복서네 가족은 ‘배가 고파서’ 북한을 떠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부모님께 서운한 감정도 있었다고 한다. 오빠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한국에 와서 어릴 때부터 수능을 준비했던 친구들과 대학입시에서 경쟁해야 했고, 최 선수는 ‘텃새’와 싸워야 했기 때문.

“하지만 제가 철이 들면서부터는 부모님께 감사하게 됐어요. 부모님은 이렇게 넓고 자유로운 세상도 있다는 걸 저희에게 보여주고 싶으셨대요. 어디나 갈 수 있고 평등한 나라요. 잘 살건 못 살건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항상 긴장 속에 살아야 되는 나라는 싫다고요.”
그녀는 자신이 떠나온 곳을 ‘꿈조차 허세인 곳’이라고 표현했다.
“한국에선 제가 노력하면 그 결과를 얻을 수 있잖아요. 희망이 있다는 거 거든요. 꿈을 가질 수 있고, 꿈을 이룰 수 있는 나라가 한국인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통일’ 얘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절실하고 간절한 것 같았다.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다 살아계시는데, 나중에 태어난 조카가 저랑 많이 닮았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보고 싶어요. 명절이면 친구들은 시골 간다고 하는데 저희는 새해가 되면 할머니 할아버지 뭐하고 계시나 또 초상집이 돼요. 어디 가서 새배해 보고 싶어요. 안 해 본지 십 년 됐어요. 그런 걸 볼 때마다 통일이 빨리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진심으로 바래요.”

복서는 한 게임 한 게임 할 때마다 눈에 띄게 성장한다고 한다. 이미 복싱생활 13년차 선수에게 ‘성장’이라는 단어가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바라는 올림픽 금메달의 꿈, 그리고 교수의 꿈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그녀를 열심히 응원해주고 싶다.

<글. 기자희 / 사진. 나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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