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꿈꾸다 | 통일을 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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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범제 화백은 20여 년 전부터 금강산을 그려왔고 세 번의 금강산 연작 전시회를 개최했다. 전시회 도록을 보니 폭 2미터에 가까운 대작들이 눈에 띄었다. 조 화백의 금강산 연작은 크게 두 가지 스타일로 나뉘어 보였다. 2008년 13회 개인전에서 선보인 일련의 금강산 작품들과 2010년 16회 작품전에서 선보인 만물상. 전자는 프랑스 작가 조르주 루오나 이중섭의 작품과 같이 물감을 두껍게 올린, 거칠고 힘찬 마티에르가 돋보이는 작품들이었다. 후자는 한국의 전통색인 오방색을 점묘법으로 채색한 것으로. 구도 자체는 단순하지만 섬세한 컬러 입자가 잘게 부서지며 신비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만물상이나 해금강, 총석정, 비룡폭포 등이 이러한 방식으로 탄생했다.

개인적으로는 거친 마티에르 쪽에 시선이 더 갔다. 힘 있는 붓 터치와 두꺼운 질감으로 표현된 바위, 노송, 그 위를 덮은 눈, 봉우리 아래 깔린 운무, 붉은 용암이 흘러내리는 듯한 단풍까지 획 하나하나에 굳건한 기상과 생동감이 느껴졌다. 반면 오방색의 점묘화법을 사용한 만물상 작품은 완숙되고 독창적인 조 화백만의 화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왜 금강산 연작을 그리게 된 것일까?
“금강산 관광이 허용됐을 때 초창기에 두 번 가량 방문했는데, 우리 조상들이 소중하게 지켜온 이곳을 나만의 기법으로, 화가의 시각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조범제 화백의 유화 작품들을 보면 부조를 연상시킬 정도로 매우 두껍다. 얇은 그림 10장을 그리고도 남을 물감의 양이 한 그림에 사용됐다. 한 번 칠하고 말려두었다가 그 위에 또 붓으로 덧입히기를 몇 십번. 그 모든 과정이 끝나야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기 때문에 한 개의 그림을 완성하는데 몇 달이 걸릴 때도 있다.

안개 가득, 새벽 여명이 깃든 산천초목의 사계를 서정적으로 담아낸 임진강 연작은 그의 또다른 내면을 깊숙이 응시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사람의 발길이 결코 닿지 않을 것만 같은 외딴 길, 몽환적인 분위기로 무심한 듯 떠있는 달, 안개 자욱한 샛강위로 보일 듯 말듯 어린 달그림자, 싸리눈이 소리 없이 쌓여 포근한 흰 옷을 짓는 새벽 설경 등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들 작품에는 집도 사람도 없다. 심지어는 산도 조연일 뿐이다. 그는 자연 안에 인간의 흔적이 있는 게 싫다고 했다.

“산 빼고 집을 빼니 풀숲하고 물 흐르는 것 밖에 뭐가 더 있겠어요? 그림이 너무 고독하고 주제가 단순하니까 자꾸 붓을 찍었고, 찍다보니까 단순함이 저절로 상쇄가 됐어요.”
그의 말처럼 그림 속 무수한 점들이 멈춰 선 풍경을 살아 숨 쉬게 만들었다. 무수하게 반복되는 작은 붓질, 섬세한 붓 터치마다 그의 예술에 대한 열정이 오롯이 담겨졌다. 그래서 임진강 연작은 마음과 영혼까지 울림을 준다. 조 화백은 산 깊숙이 자리한 조그만 화실에서 마치 수행이라도 하듯 붓 터치를 반복하며 많은 작품을 만들어 냈다.

지난 7월 조범제 화백은 서울 반포동으로 화실을 옮겼다. 그리고 발표한 작품이 바로 ‘대한민국 독도’다. 그림을 완성한 후 캔버스 뒷면에 ‘과거부터 현재를 지나 미래까지 독도는 영원한 대한민국 고유 영토이다’라고 낙관을 찍었다. 조 화백은 앞으로 독도를 50~100점 정도 그려서 내년 광복절에 독도전을 열고 싶다고 말했다.

조범제 화백은 5살 때부터 그림이 좋아서 그렸다. 하지만 ‘왜 그림을 그리는가?’에 대한 답은 나이를 먹을수록 항상 변해왔고 표현 방법 역시 계속 바뀌었다고 한다.
“50대, 60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까 그림은 자기의 내면, 인성을 공부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대상이 ‘나’라는 필터를 통해 들어오면 나는 그림을 통해 내 사상과 철학, 주관을 그 안에 투영합니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성찰하고 관조하면서 아름다운 마음을 득해야 합니다.”

조범제 화백은 그림이 아름다우려면 화가 자신의 본성이 아름다워야 하고, 내면을 아름답게 하려면 주변의 사물을 연민을 갖고 사랑해야 한고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에 가깝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남아로 태어나 독만권서(讀萬券書)와 행만리로(行萬里路)해야 한다.” 명나라 말기의 서화가 동기창(董其昌)의 말로, 서화에 향기가 나려면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를 여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조범제 화백은 “눈을 감았다 뜨면 관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네 짧은 인생이고 그걸 깨닫게 해주는 것이 책”이라며 특히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철이 들면서 보니까 조상들 중에 이름난 서화가들이 많았더라고요. 그런 영향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아요.”
알고보니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인 관아재 조영석과 소림 조석진이 그의 선조들이다. 관아재 조영석은 남종화의 정착과 풍속화 전개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며 조선 최후의 화원 화가인 소림 조석진은 1911년 전통회화 육성을 위해 창립된 서화미술원에서 제자를 양성하며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등 대가를 배출했다.
또한 조범제 화백의 집안은 독립운동가 11명을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하다. “내가 독립운동 했나? 예술가에게 왜 그런 이야기를 물어?”라며 거절 했지만 가문 이야기를 안 들을 수가 없다. 조범제 화백의 아버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인이자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시원 선생이며 어머니는 독립운동가인 이순승 여사다. 조용하, 조소앙, 조용주, 조용한 선생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큰아버지이고 고모 조용제, 누나 조순옥 여사, 매형 안춘생(안중근의 종질, 제5대 광복회 회장), 사촌형 조시제·조인제 선생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버지의 6남 1녀 형제 중 해방되고 난 뒤 아버지와 형 한 분만 살아남았으며, 마포 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해 돌아가신 분도 있다.

“맞아서 죽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게 어디 있겠습니까?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다 보니, 아무래도 나라를 생각하는 게 남다른 부분이 없지는 않아요. 또 친일 후손들이 잘 사는 걸 보면 울분이 생기곤 해요. 그래서 문화예술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예를 들어 독도를 그려서 알리는 일을 할 계획입니다.”

“TV를 보니 젊은이들이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못 알아보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심지어는 6.25도 북침이라고 거꾸로 이야기할 정도라고 하잖아요. 단군시대부터 현재까지 정리된 역사화가 없는데, 적어도 해방 이전부터 민족수난 극복사까지를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이에 조범제 화백은 20~30여명의 작가들을 규합해 2000년 대한민국 민족정기미술회를 만들고 독립기념관에서 ‘한국독립운동 기록화 특별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그 이듬해는 독립운동가 100인을 선정해서 인물화를 그렸다. 좋은 취지였고 반응도 좋았지만 작가들이 역사화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역사적 고증도 받아야 하고 재료비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자비로 하는 추진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결국 활동은 잠정 중단됐다.

조 화백은 김좌진 장군 생가나 이준 열사 기념관, 윤봉길 의사 기념관엘 가도 제대로 된 역사화가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임시정부 청사에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모여 회의를 하는 모습을 담은 역사화를 그려 놓고 싶다고 했다.
직접 작업한 역사화로는 김구 선생과 이동녕 선생의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조 화백은 백범기념관이 개관했을 때 500호짜리의 대작 ‘김구 선생 해주성 공격도’를 그렸다. 백범이 19세 때 동학에 입교한 후 동학군 대장으로 500명의 부하를 이끌고 해주성을 공격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또한 2011년 이동녕 생가 기념관 개관 시에는 이동녕 선생의 영정을 비롯, 임시정부 요인 회의 장면을 그리기도 했다.

조범제 화백은 통일에 대해서 “민족의 염원이고 통일에 대한 우리의 마음은 하나가 된지가 오래지 않습니까”라고 운을 뗐다. 그는 통일을 이루려면 분열되지 않는 한 마음으로 각자가 자신의 분야에서 더 분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같은 작가들은 직접 통일운동을 하진 않더라도 북한의 명산 전시회를 한다거나 결속을 다질 수 있는 문화활동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로 엮을 수 있을 지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화가가 자기만의 화법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조범제 화백은 10대부터 지금까지 하루 20시간씩 작업을 해왔다. 어느 분야에서든 열정적으로 자기한테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기본 철학이다.
“내가 선택한 분야에서 얼마나 만족스러운 작품을 만들어 낼 것인가 항상 고민합니다. 그림 위에 사인을 한 순간부터 이미 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늘 새로운 것을 찾아서 방황을 하지요. 인류가 이루어 낸 것은 아직 미미합니다. 미(美)적인 부분에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아직 무궁무진하게 남아있기에 저는 오늘도 밤을 지새우고 있는 것입니다.”

<글, 기자희 / 사진. 나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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