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통일 | 여행이 문화를 만나다

겨울 산과 바다가 맞닿은 평화의 땅,
강원도 양양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바다에 섰었네.

-김남조 <겨울바다>

강원도 양양

파도가 치면 바다는 처음 만난 새로운 것이 된다. 아직 무엇이라 부르기 전, 사유 이전의 원시의 시공. 그리하여 가장 오래되었으나 매번 새로운 곳이 바다다. 양양 땅에 한때 38선이 그어지고 포화의 역사를 치러낸 그 자취는 아직 남아 있으나 물결이 물결과 섞여 새로워지듯 사람들은 그 자리를, 평화로운 삶으로 채워가며 사랑하였다. 어제까지 수면 아래 꿈꾸고 있던 태양이 아침마다 수평선 밖으로 힘차게 오르는 곳. 빛은 사방에 넘실거리며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않고 자유롭고 평안하다.

애국가 소나무 뒤로 펼쳐지는
푸른 해원, 하조대

애국가 화면에 등장하는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거친 해풍에도 그 기상은 오히려 우뚝하여, ‘하조대 애국송’으로 불린다. 애국송은 보호수로 수령이 200년이 넘었는데, 바람에 비록 구부러졌으나 단단한 기세가 마치 우국충정으로 나라를 수호하는 듯 노련한 장수의 모습이다.

그 곁에는 ‘하조대’라는 정자가 있는데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개혁가였던 하륜과 조준이 만년을 보냈다고 하여 그 성씨를 한 글자씩 가져왔다고 한다. 조선 2대 왕인 정종이 세운 정자로 이후 여러 번 개축하였지만, 그 풍모는 1960년대에 지어진 현재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동쪽 끝 바다에 왕이 세운 정자가 있다는 점이 이채로운데 이 두 인물이 당시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는지를 방증하는 듯하다. 하륜과 조준은 각각 정치적 행보와 운명이 달랐으나, 조선이라는 국가의 큰 판을 짜고 법률과 직제 등을 마련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고, 수백 년을 이어갈 왕실의 주춧돌을 세운 킹메이커들이자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하더라도 꿈이 꿈에 머무르지 않고 실현되기 위해서는 하늘의 도움이 있어야 할 터, 정자가 앉아 있는 사방의 기운도 예사롭지 않다.

▲ ‘애국가 소나무’로 알려진 애국송

▲ 하조대에서 바라 본 푸른 동해

하조대 정자에서 돌아 나와 다른 갈래 길로 들어가면 새하얀 등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보는 일출은 장엄하기로 손에 꼽힌다. 일출뿐만 아니라 해질 무렵 땅거미가 지면 바다를 비추는 등대의 불빛 또한 장관이라 한다. 어둠 속에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등대는 4초에 한 번이나 6초에 두 번, 깜빡인다.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다 누가 길 좀 알려주었으면 하고 바랄 때 문득 보이는 그 불빛이 얼마나 반가울까. ‘하조대에 온 사람은 그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그 말처럼 바다 앞에 서니 머리와 가슴이 열린다. 낯선 내가 되어, 뒤편에 놓고 온 과거의 나를 돌아보게 되는 바다. 어쩌면 이곳은 지도의 동쪽 해안선 어딘가가 아니라 세상이 태어나는 중심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이 푸른 절벽까지 밀려와 바다를 향해 가슴을 열고 간구하는 소망들은 무엇일까.

▲ 하조대 정자의 전경

▲ 일출 명소로 꼽히는 하조대 등대

38선을 넘어 해안을 걷는 평화로운 순례길,
38선 휴게소부터 남애항까지

바다를 이어지는 7번 국도를 따라가는 길은 사실 정해진 경로 안내 없이도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길을 따라가다 멈추고 싶으면 멈추고, 또 걷고 싶으면 걸으면 된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아니라 끝도 없이 벅찬 풍경이 이어진다. 단순히 아름답다기보다는 현실을 가리고 있던 막이 거두어지고,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하는 길이다. 그저 오롯한 자연 앞에서는 대화도 잊고 생각에 잠겨 순례자가 된다. 그렇게 끝도 없이 오래도록 걷고 걷는다.

38선 휴게소는 기사문항 근처에 있다. 휴게소 앞에는 한국전쟁 이전 그어졌던 38선의 흔적을 남긴 표지석이 있지만, 주변의 풍경은 그저 고요한 동해안의 해변풍경이다. 이곳 휴게소는 자그마한 시골 슈퍼 같은 정취를 풍기는데, 7번 국도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한 박자 쉬어갈 만한 자그마한 쉼터 기능을 한다. 38선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아마도 누리지 못했을 평화다. 함부로 선을 그어 나뉘었던 아픈 역사의 장소는 이제 한없이 너그러운 쉴 곳이 되었다. 쉬어가려는 자는 누구든 언제까지고 쉬어갈 수 있다.

▲ 38선 휴게소 앞의 표지석

▲휴휴암 앞 너럭바위 ‘연화대’ (원안에는 휴휴암 앞바다의 황어떼)

길을 따라 가다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명소들이 곳곳에 나타난다. 휴휴암(休休庵)은 쉬고(休) 또 쉬라는(休)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진리는 둘이 아니다’라는 의미의 불이문(不二門)을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속세의 먼지를 털고 또 다른 존재가 된 듯 마음이 가벼워진다. 갯바위 쪽으로 나가면 널따란 너럭바위 연화대가 펼쳐져 있다. 너럭바위 앞 바다엔 우럭과 황어 같은 물고기 수천 마리가 모여 장관을 이룬다. 이곳에서 방생한 어린 물고기가 자라 큰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황어는 양양의 또 다른 명물인 연어처럼 다 자라면 처음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 회유성 물고기라 한다. 어쩌면 이곳은 그들이 기억하는 고향이고 근원인 셈이다. 늘 그리워하는 마음, 그 그리움의 힘으로 우리는 천천히 파도처럼 스며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휴휴암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강원도 3대 미항으로 이름난 남애항이 있다. ‘남쪽 바다’라는 뜻의 남애(南涯)처럼 동해안임에도 남쪽을 향해 항구가 자리 잡고 있는, 항아리형 항구가 마치 어머니의 품 같다. 이곳은 영화 <고래사냥>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한데, 그 마지막 내용이 평생을 바람처럼 떠돌던 춘자가 고향의 어머니 품에 안기는 것으로, 고래는 먼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는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실연한 청년, 가진 것 없는 거지 왕초, 벙어리 춘자가 자전거를 훔쳐 타고 이 바다에 도착해 반짝이는 해변가를 달리던 장면처럼 이 바다에서 청춘의 꿈이 되살아날 것 같다.

▲ 강원도 3대 미항으로 이름난 남애항

한반도의 중추 태백산맥이 뻗은 하늘 끝자리,
한계령(오색령)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졌던 사유는 더욱 깊어지고, 깊어질수록 더욱 스스로 혹독해져 마침내 사유의 끝에 다다른다. 윤동주의 시 <간>에서처럼 내부의 독수리는 거대한 날개를 펴고 더 높은 곳으로 비상한다. 깊어질 대로 깊어진 사유의 끝에 마침내 하늘과 닿은 설악산에 다다른다. 외롭게 스스로를 다져가는 겨울 설악산의 풍모는 그리하여 여윈 신령의 모습이다. 한반도의 중추 태백산맥에서 가장 높다는 설악산 대청봉을 기준으로 동쪽 바다 방향은 외설악, 서쪽의 육지 방향은 내설악이라 하고, 한계령(오색령) 이남의 오색지구는 남설악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남설악 지역에서 강원도 인제군과 양양군 사이에 있는 1,004m 고개를 한계령, 또는 오색령이라 부른다. ‘오색’이라는 이름은 톡 쏘는 탄산 맛으로 이름난 오색약수터 부근에 오래전 오색석사라는 사찰에 다섯 가지 색깔 꽃이 피는 오색화라는 나무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오색약수터에서 3km 정도 올라가면, 오색온천이 있는데, 수온이 35~38도 정도 되는 알칼리성의 온천수는 신경통에 효험이 있고 피부에도 좋아 예로부터 미인 온천으로 불렸다고 한다. 오색약수터 부근에는 누구나 앉아 지친 발을 담그고 쉴 수 있는 족욕탕도 있다. 기운을 북돋고 건강을 보하는 약수와 온천은 세상을 살아내느라 몸과 마음에 쌓아두었던 독을 정화해준다.

▲ 톡 쏘는 탄산수, 오색약수

‘ ▲오색온천 노천 족욕탕

많은 사람이 즐겨 부르는 <한계령>이라는 노래의 가사는 본디 정덕수의 <한계령에서>라는 시 구절을 다듬어 만들었다. 이 <한계령>이라는 노래는 다시 양귀자의 소설 <한계령>을 비롯해 이후 수많은 예술 분야를 넘나들며 반복되며 인생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봉우리를 향해 힘겹게 올라가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지친 어깨를 떠미는 바람밖에 없다는 것. 그저 설악산의 고개 중 하나였던 지명은 이제 만인의 사랑을 받는 철학적인 단어로 거듭났다. 어쩌면 ‘한계령’은 인생의 회한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에 대한 위안과 격려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높은 산을 오르듯, 쉬지 않고 땀 흘려온 수고로운 인생들에 대한 따뜻한 한마디가 아닐까. 지금 그대는 그대로도 충분히 괜찮다, 괜찮다고. 그러니 힘을 내라고.

<글_김혜진, 사진_김규성>

※ 웹진 <e-행복한통일>에 게재된 내용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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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발행 : 2017-12-11 / 제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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